미간 위 이미지 둘 Real or Hallucinated, Two Images on the Forehead 전효경 Hyo Gyoung Jeon 인간은 두 개의 눈을 가졌고, 두 눈은 각기 다른 시야를 가진다. 평상시 두 눈은 항상 대상을 각각 인지하지만, 우리의 뇌는 두 개의 망막이 인식한 두 개의 상을 하나로 인지하게 한다. 그런데 두 눈이 본 것이 하나로 겹쳐지는데 문제가 생겨서 상이 두 개로 나뉘어져 보이거나 흔들려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는 입체시(stereopsis, 立體視)라고 일컫는 현상이다. 이러한 원리를 사용하여, 대상에 입체감을 형성하여 인지하도록 한 것이 3D 안경이다. 이렇게 사람의 뇌는 두 눈이 받아들이는 시각 정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여러 정보 중에서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대상을 먼저 인식한다. 이를 이미지 분할(image segmentation)이라고 부르는데, 한 이미지 안에서 배경이나 가장자리를 흐리고 특정 대상에만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은 물론 두 눈 사이의 간격(interocular)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에, 특정 도구을 사용하면 대상을 하나의 상으로 인지하기 이전에 두 눈이 보는 각각의 이미지를 그 자체로 바라볼 수도 있다.(1) 김무영이 미간을 의식하는 것은 구태여 두 눈이 응시하는 것을 따로 떼어 바라보려는 노력에서 온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관람자들은 김무영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사람을 포함한 여러 대상들을 일종의 초상화처럼 오롯이 인식하게 된다. 개별적으로 드러난 이 피사체들은 관람자의 기대와 다르게 무엇인가를 지시하거나 특정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또한 김무영의 작업에서 그 대상이 놓인 장소나 공간의 차원과 같은 맥락을 단번에 인식하기도 어렵다. 이런 조건을 포함한 김무영의 이미지들은 대체적으로 파편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카메라를 쥐고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는 한 곳을 오래 응시하기 보다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계속 움직인다. 그래서 대상이 나타난 주변의 정황이 끊임없이 변한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김무영의 영상에서 각 시퀀스의 길이는 비교적 짧은 편이거나 혹은 반대로 기대한 것보다 길다. 김무영은 그 대상 자체에 집중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대상을 인지하고 바라보며, 대상의 정보를 흡수하는 모든 과정에 대해 세세하게 스스로 의식화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카메라를 쥐고 있는(혹은 이를 연출하는) 주체인 작가는, 그의 눈앞의 사람을 어떻게 보는지, 특정 사물을 어떻게 보는지의 문제에 천착한다. 작가는 어딘가에 매료되어 자신이 애착을 가지고 있는 대상에 무조건적으로 집중하고 있다. 그 집중에 스스로 솔직한 채 작가의 생각은 일종의 마인드맵을 가지고 덩굴처럼 퍼져나간다. 선형적인 구조를 가진 영상이나, 특정한 동선을 가지고 이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장 안에서, 작가의 생각을 정리된 모양으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대신 나는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사고의 구조를 해체하여 이해하는 것보다는 그 자체의 해리적인 경험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다. 김무영의 사진 연작 (2021)를 보면 가장 단적으로 작가에게 대상이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볼 수 있다. 이 사진 작품은 김무영이 모두 아이폰을 가지고 찍은 것으로, 아이폰을 빠르게 흔들어 기존 카메라의 명암법 기능에 장애를 의도하여 나온 결과물이다. 어떤 작품은 마치 난시가 심한 사람의 비전을 엿보는 것처럼 여러 개의 얇은 레이어 위에서 피사체가 흔들려 보이고, 대상의 주변은 거의 검은 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으로 뒤덮여져 있다. 이는 언뜻 ‘키아로스큐로(Chiaroscuro)’ 기법(2)을 생각나게 한다. 명암의 대비가 극명한 이 기법은 16세기 이후로 회화나 사진 등 미술사에서 두루 사용됐는데, 특히 김무영의 사진은 짙은 번트 시에나 톤을 가진 사진의 배경에서 오는 기시감 때문에,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카라바지오 회화에서의 그것과 더 닮아 있다. 대상을 고르게 묘사하는 것이 중요했던 이전의 회화와 다르게 카라바지오는 그림을 그리는 주체나 대상의 주관적인 감정에 집중할 수 있는 형식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김무영의 사진에서, 피사체는 깊은 어둠에서 그 실체가 끄집어 올려져 갑자기, 혹은 서서히 노출된 것 같다. 그래서 인지 대체적으로 피사체의 가장자리가 흐려져 있다. 정지된 피사체가 사진에 담기는 짧은 시간 동안 아이폰을 빠르게 흔들어 촬영한 이 사진들은 얇은 여러 겹의 레이어를 가진다. 양쪽 눈의 망막에 상이 맺히는 과정을 아주 짤막한 타임 프레임 단위로 쪼개어 단일한 화면 안에 다시 펼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대상 자체를 보여주기 위해 사진을 찍기 보다는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인식 과정을 펼친 도면처럼 사진이라는 매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사진들은 이미지 안에서 펼쳐진 얇은 레이어의 성격을 손에 잡히는 형식으로 구현한 듯 프레임 없이, 납작하게 벽에 붙어 있다. 이미지를 인화한 종이(혹은 다른 물질)는 벽에 약간 구김이 남아있는 형태로 붙어 있어 명백한 질감과 두께를 가지고 있으며, 앞에서 이야기한 바로크 시대의 유화처럼 약간의 광이 보인다. 먼지 쌓인 오래된 회화를 다시 전시장으로 불러온 듯, 이미지들은 어딘가 과거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게 나와 마주할 수 있는 전시장으로 어딘가에서 소환된 이 이미지들은 한 이미지를 이루기 위해 있어야 할 많은 요소들이 소거된 채, 얇은 막을 가진 채로, 갑작스럽게 외딴 곳으로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다. 그는 이와 비슷한 미장센을 영상 작품에서도 활용하고 있다. 이미 ‘키아로스큐로'라는 단어를 제목에 사용한 영상 작품 (2021)에서 이미지들은 렌즈, 유리, 피아노 등 어딘가에 반사된 모습으로 나타나 얇은 막들이 겹쳐진다.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 이 영상에서, 두 번째 부분인 ‘Chiaroscuro as a Predicament’에는 실제로 닮은 엄마와 딸의 얼굴이 겹쳐져 나타난다. 등장하는 퍼포머의 시선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일이 거의 없거나, 그 시선이 강하지 않은 다른 부분과 달리 이 챕터에서는 닮은 얼굴의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뜨고 카메라를 또렷이 응시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의 모습은 겹쳐진 상태로, 어두운 배경에서 얼굴만, 혹은 몸의 움직임만 바라볼 수 있도록 짙은 배경을 가지고 나타나며, 이들을 비추는 카메라는 두 얼굴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패닝한다. 패닝이 반복될 때 다른 것은 사라지고 이 두 얼굴의 존재마저 거의 하나로 겹쳐진다. 이순간 이들의 닮음이, 그 존재론적인 환기가, 어떠한 형태로 작가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가장 오래 남았다. 그의 또 다른 영상 작업 (2021)에서는 침대 위에서 바라본 모습들이 프레넬(fresnel) 렌즈를 통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침대 위에서의 시야는 오해할 것이 없다. 사적이고, 은밀하며, 그 공간 안에서 인지하는 일반적인 구조는 아주 단순한 도면을 기반하여 펼쳐진다. 그러나 김무영은 반대로 이 두 등장 인물의 확실한 시야를 굳이 의심하게 하고, 이들을 둘러싼 세계를 낯설게 한다. 여기서 카메라를 든 사람의 존재감 또한 명확한데 이는 거의 모든 순간에 두 등장 인물이 카메라를 든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 사람의 프레임 안에서 수동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김무영은 이런 방식으로 감각을 하나씩 떼어낸다. 왼쪽 오른쪽의 두 눈 뿐만 아니라, 몸의 각 부분이 느끼는 감각을 분리하여 개별적인 감각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나 시간을 부여한다. 특히 이런 특징은 김무영의 퍼포먼스 <미간 위 집>(2022)에서 더 잘 나타난다.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퍼포먼스의 설정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김무영 개인전 전시장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에는 총 퍼포머가 다섯 명 등장하는데, 네 명은 분량을 고르게 나눠가져 모두 주인공처럼 나타나고, 한 명은 연주자로 등장한다.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전시장 안에 이미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들과 함께 노이즈 사운드는 공간 안에서 소리의 구조를 만든다. 사운드는 당연히 시간을 따라 진행되지만 선형적인 전개보다는 공간 안에 다르게 위치하고 있으며, 구조에 진동을 가하여 공간의 구조를 확장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리고 그 소리의 시작과 끝을 제어하는 사람이 있으며, 퍼포먼스를 촬영하는 사람들이 둘 있는데, 그들도 퍼포머들과 비슷한 모양의 옷을 입고 퍼포먼스의 장면 안에 들어와 있다. 시간이 되면 관람객들이 어두운 전시장 안으로 입장하면서 퍼포먼스가 시작된다. 네 명의 주인공들은 이미 공간 안에 자리하고 있다. 관람객들은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바닥에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퍼포머들에게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을 각자 찾아 서거나 앉는다. 관람객들이 모두 자리를 잡을 때 즈음, 플래시를 켠 아이폰을 입에 물고 있는 퍼포머에게 시선이 멈춘다. 다른 퍼포머가 그의 입에 있는 아이폰을 빼고, 두 개의 아이폰을 가지고 누군가를 바라본다. 퍼포머의 두 눈처럼 사용된 두 아이폰 카메라 렌즈는 대상을 보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 같다. 그렇게, 길게 늘어진 필름처럼 느리게 퍼포머들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퍼포머들의 눈빛은 어느 한 곳도 응시하지 않은 채 퍼져 있고, 이들의 근육은, 외부의 어떤 힘(디렉션)에 의해서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수동적으로 움직인다. 근육의 표정마저 멍하게 만들어버린 이 퍼포먼스의 코레오그라프에서 퍼포머들에게 자발적으로 무엇을 진행하게 하는 등의 성격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들은 공간 안에 각자의 수행 목록을 가지고 펼쳐졌다가 다시 기찻길처럼 이어지고, 한 몸으로 포개어 지는 어떤 의식을 행한 후, 다시 흩어지고 만다. 여기서 단 한 사람 ‘자주적인’ 성격을 가지는 인물은 연주자인데 그는 퍼포먼스 진행의 중간 쯤 별안간 등장하여 연주와 노래를 하고 다시 사라진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김무영이 직접 쓴 가사로 만들어졌고, 퍼포먼스에서 유일하게 언어가 전해지는 시간이다. 작가는 퍼포먼스 장면의 밖에 존재하고, 퍼포먼스 장면 안의 등장인물들을 포함한 여러 요소를 마치 소품처럼 ‘다루고’ 있다. 퍼포머들의 활기없음은 영혼을 잃어버린 살덩이와 거기에 가해진 중력을 드러낸다. 그들은 실제로 어떤 동물을 암시하는 사물을 가지고 있다가 해체시키고, 그 ‘동물'의 살과 피를 몸에 바르거나 먹어버리는 듯한 행위를 취하는데 이것은 생명을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일종의 애도와 같은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몸에 죽어버린 다른 몸이 한데 겹쳐질 때, 살아있는 인간의 몸도 다른 것들과 다름없다는 처절한 헛헛함을 드러낼 뿐이다. 또한 퍼포먼스가 클라이막스에 다다르면 네 명의 퍼포머들이 천천히 움직여 하나의 몸으로 포개지는데, 마치 이들의 오지(orgy)를 보는 듯 하다. 이 퍼포머들의 섹스에 리비도는 없어 보이고, 종교적인 의식을 치루듯, 순서를 따라 특정 스코어가 진행될 뿐이다. 전반적으로 김무영 본인을 포함하여 이 전시에 참여한 이들은, 한 몸을 이룬 듯 가까워 보였는데, 여기에서 느껴진 모종의 배타성은 관람자인 나를 여전히 먼발치에서 관조하게 한다. 영상이나 퍼포먼스에 등장하는 퍼포머들이 가진 지속적인 수동성은 복종해야 하는 어떤 힘에 대한 의식처럼 느껴진다. 작업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실질적으로 김무영의 디렉션이겠지만, 이를 수행하고 있는 작가 본인에게는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또 다른 힘의 작용을 투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미간 위 집>에서 연결되고, 위임된 여러 감각들은 결국 해리된 상태로 떠다닌다. 나는 그것을 다시 주워담아 하나의 줄기로 정리하는 것보다는 해리된 존재를 목도하면서 다시 그 실존을 바라보게 되었다. 특히 작가는 퍼포먼스 관객들에게 배포하는 핸드 아웃에 ‘배드 트립'이라는 단어를 가져와 어떤 상태를 설명한다. 특정 환각 약물을 먹으면 대상을 인지하는 것에 장애가 생기는데, 때로 그 효과가 예기치 못하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컨트롤할 수 없는 방식으로 특정 감각은 비대해지거나 혹은 취소된다. 김무영은 이러한 ‘배드 트립’의 상태를 “감각을 위임하는 것”으로 인지한다.(3)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 있었던 사이키델릭 시대의 영화 <트립(The Trip)>(1967)을 보면 당시 LSD라는 약물이 유행하던 때의 상황을 소상히 볼 수 있다. 사이키델릭 운동에서는 약물 그 자체보다 새로운 표현 방식에 대한 갈구와 그 주체의 실존을 더 뚜렷하게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했었다.(4) 특히 이 영화의 주인공 폴은 부인이 자신을 떠난 후, 자신의 삶에 찾아온 위기를 극복해보려고 LSD를 처음 복용한다. 그는 여러 형태의 쾌락, 낯섦, 죽음, 극한의 두려움 등을 일으키는 환각을 짧은 시간동안 극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환각 작용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지만, 환각적인 이미지를 인식하는 당사자가 이를 기억하는 한 자신이 알게된 확장된 감각에 대한 인지는 그대로 남는다. 퍼포먼스의 전개 속에 몰입했다가 나온 후에 전시장을 다시 거닐면 전시의 많은 부분들이 다르게 보인다. 어쩌면 퍼포먼스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전시 기간에 있었던 퍼포먼스와 퍼포머들의 에너지를 직접 몸으로 마주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가장 단편적으로는 전시장에 동물의 털처럼 생긴 퍼포먼스의 파편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겠지만, 퍼포먼스가 지나간 자리에 작가의 세계 안에 있었던 또 다른 타임 프레임이 전시장 안에 생겨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그가 일상의 어떤 순간과 특별히 상관없는 어느 타임 프레임에 자신의 이야기를 위치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무영의 작품에서 특정 시간에 대한 인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그의 사진이나 영상 작품에서 나타나는 빛에 자연광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하루의 어느 시간 즈음에 이 작품을 만들었을지, 이 작품들의 시간적 세팅이 어느 때쯤인지 가늠할 수 없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이 다른 시간의 층위를 의식하니, 마치 밤에만 활동하는 어떤 존재들처럼, 전시장의 하얀 벽을 사이에 두고 개별적으로 나타났던 작품들이 연결되고 활성화되는 듯하다. 이 판타즈마고리아와 같은 비전이 특이한 시간 속에서 파노라마를 형성할 때, 일상의 시간과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이것이 김무영에게는 ‘트립’의 시간성이 아닐까. ‘트립’은 실제로 일시적이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시간이다. 그것은 어쩌면 몸에서 영혼이 떨어져 나가고 살덩이만 남은 적나라한 모습을 목도하는 시간이고, 그저 몸일 뿐인 우리를, 미간 사이에서 떠다니는 이미지를 바라볼 수 있는 감각이라는 실마리를 통해, 스스로 바라보는 순간이다. (1)Vilayanur S. Ramachandran & Diane Rogers-Ramachandran, “Illusions: Two Eyes, Two Views" in Scientific American Mind 20, 5, 22-24 (September 2009). https://www.scientificamerican.com/article/two-eyes-two-views/ (2)내셔널갤러리 용어 사전. https://www.nationalgallery.org.uk/paintings/glossary/chiaroscuro 참고. (3)김무영, <미간 위 집>(2022) 핸드아웃, 뮤지엄헤드. (4)J. McDonald는 아래 기사에서 그레이트풀데드의 기타리스트 밥 웨어(Bob Weir)의 말을 참고했다. E. Vulliamy, "Love and Haight", Observer Music Monthly, 20 May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