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면 독백 Soliloquy of the Obverse in Reverse 류다연 Dayun Ryu 사람의 뇌는 빛의 부재를 어둠으로 보도록 훈련받는다. 어둠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둠은 빛이 쬐인 곳으로 결여된 존재, 총체적인 공허다. 어둠의 기원은 빛의 움직임이 도달하지 못한 미지의 첨단이다. 광원으로 더듬어 가보는 것이 어떤 설명을 제공해 줄 수도 있다. 현재 서울과 프랑크푸르트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무영은 2021년 12월 10일부터 2022년 2월 12일까지 진행된 그의 첫 개인전 ≪미간 위 집≫에서 이 무한한 어둠에 외접한 성찰을 보여준다. 긴 틈으로 침투한 빛이 어둠에 싸인 전시장을 밝힌다. 뮤지엄헤드는 카메라 옵스큐라와 같다. 밖에는, 시든 덩굴이 옆 건물을 휘감고 있고 그 속을 지나는 사슬에 스피커 한 대가 매달려 있다. 벨라, 김한주, 그리고 김무영이 함께 작업한 (2021)의 기괴한 소리는 전시의 머리말 혹은 나가는 말을 매만지는 듯 건물 밖 청명한 겨울 공기를 관통하고 있다. 아래 이어지는 글은 김무영의 혼선적인 비전들로 밝혀진 뮤지엄헤드 내부를 세 부분으로 나눠 기록한다. I. 전시 공간에는 김무영과 벨라, 위지영, 키티, 이연석, 배문영, 이창현 등 그의 각별한 협업자들이 함께 작업한 사진, 비디오, 회화들이 산재해 있다. 노출 콘크리트 천장 아래 스피커의 가녀린 전선들은 사슬과 얽힌 채 허공에 매달려 있다. TV 모니터는 치과에서 사용하는 단단한 흰색 금속 지지대에 붙어있고, 일부 사진은 벽에 못으로 바로 고정되어 있다. 나는 이 사진 작업들로 글을 시작한다. 이 환영 같은 사진들이 디지털 기기를 조작하는 김무영의 독특한 방식에 대한 이해를 직접적으로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너희 둘은 날 안 쳐다봐>(2021)는 아이폰 카메라의 무대 조명 모드를 이용한 초상 사진 연작이다. 여기서 카메라는 정면을 응시하는 사람의 몸을 전경으로 감지하고 나머지 전부는 어두운 색조의 배경으로 뭉뚱그린다. 작가는 기본 셔터스피드와 카메라 알고리즘을 단일 피사체를 저버리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작가는 마치 캔버스에 댄 붓의 움직임처럼 카메라를 격렬하게 흔들어 알고리즘에 허점을 그려 넣는다. 출력되는 사진들은 빠른 순간에 선명하고 정확한 이미지를 생성하려는 카메라의 타고난(innate) 목적과 상반된다. 대신, 흐릿하고 왜곡된 상의 광채이자 글리치가 틈새를 비집고 나온다. 강렬한 저킹(jerking) 동작은 어둠을 파편 시키고, 부서진 어둠 속에서 빛의 망령처럼 얼굴과 몸의 부분들이 추상화되고 유착된다.  본 연작 중 <왜 너희 둘은 날 안 쳐다봐 [h 133/272]>(2021)는 전시장 기둥에 유광 마감으로 밀착되어 있지만 차갑고 딱딱한 표면에 인쇄물은 축축한 광택제의 무게를 못 이긴 나머지 주름져 굳어 있다. 272번의 테이크 중 133번째인 이 초상 사진은 사람의 피부 주름처럼, 나무의 갈라진 표피처럼, 울어버린 질감은 시간의 흐름을 강조한다. 나의 시선은 카메라를 여념 없이 노려보는 눈에 고정된다. 하지만 사진을 실제로 지배하고 전경으로 올라오는 것은 초점이 맞춰진 대상 하나를 에워싸는 모든 것을 흡수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어둠이다. 이 압도적인 불투명성은 이연석의 회화 작품들에서 단일한 물건으로 변하는데, 이는 (2019, 2021)와 함께 퍼포먼스의 사후세계에 대한 작가의 고찰로 이어진다. 두 작품은 그의 2019년 퍼포먼스 의 부분이자 전체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시간 기반의 작업이 기억되고 아카이브 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프록시(proxy)들이다. 이연석의 회화 네 점은, 김무영의 이전 작업과 신작들이 공존하는 시간적·물리적 맥락에 위치해 의 참조점이라는 본래의 존재성에서 새로운 주체의식을 지니게 된다. 각 목재는 타르와 유화로 처리되어 어두운 것이나 오염된 것의 특수한 감각을 드러낸다. 한 나무 조각에 격렬한 해칭이 무광으로 마감되어 있는데 어두운 색조의 부드러움과 해칭 자국의 간결함은 벽에 난 구렁으로, 쉼표로, 관객이 그들 모습을 들여다보게 부추기는 흑경(black mirror)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에서는 기록 촬영자가 퍼포먼스 안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별도의 가이드라인을 받았다. 촬영자에게만 전달되었던 지시문은 이번 전시에서 (2019, 2021)라는 제목의 세 장의 낱장 인쇄물로 공개되어 있다. 과거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 코드에서 발췌된 이 문서는 기록자의 움직임을 결정지었다. 해당 제작 코드는 1900년대 중반 예술의 도덕성과 책임을 토대로 영화에서 사용하는 언어 및 행동에 대한 일련의 규칙을 명시해 놓은 것으로, 미국의 많은 주요 영화 제작사가 그들의 영화에서 불경한 요소를 스스로 검열하도록 했다. 전시 공간의 중앙에 위치한 작가의 지침서를 읽은 이후, 전시된 거의 모든 사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 암흑의 영역들은 다른 함축과 연루된다. 그 영역들은 일부 정보를 완전히 가려버리는 고의적인 내밀함, 정보를 누락시키는 검열 행위로써 재맥락화 되는 것이다. II. 관객들은 퍼포먼스 <미간 위 집>(2022)의 시작 전 바깥에 배치된 리플릿에서 작가의 글을 읽게 된다. 그중 저예산 영화들에서 총격 장면을 촬영하는 방법을 서술한 단락이 있다. 투철한 신 블로킹과 세심한 카메라 앵글 뒤에서 누군가 총을 겨눈다. 가해자와 표적은 시선을 교환하여 가짜 피가 뿜어져 나오고 뒤이은 죽음의 동작들을 수행할 신호를 정한다. 나는 총알이 발사되기 전 만들어지는 이 여지없이 긴박하고 직선적인 시선의 찰나에 주목한다. 그것은 가해자의 시선에서부터 총신을 통과해 피해자 몸의 눈까지를 꿰는 실선이다. 총 쏘는 사람과 표적의 눈빛 교환은 한순간 정반대의 관계항에서 그들을 하나로 만든다. 이 긴박한 시선의 교환은 공연 <미간 위 집>의 한 장면에서 최면술 같은 과장된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퍼포머 한 명(가리키는 자)은 상대의 왼⋅오른눈을 갈라놓는 등성이, 즉 미간을 향해 자신의 검지를 가리킨다. 사팔뜨기 눈을 한 상대(응시하는 자)는 엇갈리는 시선들을 검지 끝으로 꿋꿋이 수렴하려 한다. 응시하는 자는 네발로 바닥을 기고 있는 퍼포머(네발로 기는 자)의 등 위에 올라타 있다. 응시하는 자의 시선이 가리키는 자에 사로잡힌 와중, 네발로 기는 자는 손을 발로, 발을 손으로 앞으로 움직인다. 세 퍼포머는 한 몸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응시하는 자의 눈은 가리키는 자의 것인 동시에 가리키는 자의 손끝 방향은 네발로 기는 자를 따라 결정된다. 조직된 움직임은 그들의 눈을 단일한 초점으로 묶어 놓고 시선의 자율성을 열망하는 것처럼 전진한다. 총을 검지로, 검지를 카메라로 바꿔보자. 김무영과 민혜인이 함께 만든 (2021)에서, 촬영자와 배우들은 카메라를 매개로 환각적인 시각적 대화에 몸담는다. 호텔 방 안 두 사람이 있다. 숨 섞인 플룻 소리가 두 인물 사이에 간간이 끼어드는 이 영상에서 카메라와 피사체는 호텔의 구조에 얽매인 채로 더욱 긴밀하게 인접해 있다. 미장센 곳곳에 프레즈넬 렌즈판(평평하게 만든 볼록렌즈)이 놓여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렌즈의 개입은 배우들의 신체 비율과 사물의 초점거리를 과장시켜 공간의 의인화나 육체의 공간화를 환기한다. 카메라 몸체에서 이탈한 또 다른 렌즈인 양, 이 유리판은 실제 카메라가 어디를 겨냥하고 있는지 관객을 헷갈리게 한다. 마치 카메라가 반영하는 것은 사실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있는 것인 듯, 전경과 후경은 교차적인 영역으로 버무려진다. 렌즈판은 시야의 이러한 변증법적 플레이에서 다른 용적(dimension)을 지닌 곳의 입구처럼 세계를 한 겹 뜯어낸다. 관객은 서사가 들리지 않는데 일구이언인 대사를 목격한다. 서로의 응시에 계속 갇힌 채로, 피사체와 촬영자 간의 긴장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다.  III. 김무영의 시각 언어는 암호화되어 있다. 영화, 문학, 그리스 신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참조된 수많은 레이어는 여러 방향으로 작동해, 관객은 그의 작업에서 반복하고 변주하는 기법적 선택들, 주제적 탐구들을 만화경 같은 서사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각종 기법적·개념적 체계들은 작가의 이중(doubleness)에 대한 단상, 이 단상이 제안하는 바이너리, 그리고 바이너리의 덫에서 풀려나오는 경우의 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소켓: 양쪽 출구, 곤경에 처한 명암, 인형의 집>(2021)를 제작할 때 샴쌍둥이의 분리 수술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퍼포머 민혜인과 그녀의 어머니를 섭외한 뒤, 이원성을 둘로 나눠진 하나의 정체로, 세 챕터를 걸쳐 탐구한다. 1부에서는 두 배우가 가정집 거실에서 서로를 느슨하게 모방하고 있고, 그 모습은 각각 따로 촬영되어 있다. 각 영상은 반투명하게 서로 중첩되어 있고, 두 배우가 붙었다 헤어지는 경로가 리듬감 있는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2부에서는 모녀의 얼굴은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어둠 속에서 형체화된다. 또 한 번 그들의 따로 촬영된 얼굴은 겹쳐지고, 둘의 닮음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탈바꿈시킬 것만 같은 지경으로 나아가지만 절대로 완벽한 비슷함으로 좁혀지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두 갈래로 표현된 하나인 것이다. 영상의 편집은 환각적이고 자각몽 같은 느낌을 준다. 자각몽에서 의식은 급격한 수면 상태와 또렷이 깨어있는 상태, 두 부분으로 갈라져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엉키고 배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경험하는 사람은 ‘비-현실’을 예리하게 인지하는 동시에 심상을 손에 잡힐 듯이 감각하는 모순에 처한다.  1분 남짓한 3부 ‘인형의 집’은 완전히 다른 배우를 등장시킨다. 작가의 다른 작업에도 자주 등장하는 키티가 본디지 스타일의 두꺼운 로프로 짜인 흰 드레스를 입고 있다. 키티는 줄곧 모녀가 배회한 곳에 서 그들의 환영을 보는 눈속임에 빠진다.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는 이전 챕터들의 잔상을 깨트리는 마지막 장면은, 키티가 주역을 맡게 될 퍼포먼스 <미간 위 집>의 서곡처럼 기능한다. 이틀 밤 동안 전시장을 배경으로 퍼포먼스가 진행된다. 관객들은 자신의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어둠 속에 잠긴 전시장에 들어선다. 현란하게 움직이던 불빛들의 춤이 점차 사그라들면, 휴대폰 플래시를 입속에 넣은 한 퍼포머의 얼굴에서 피부막을 뚫고 새어 나오는 반투명하고 붉은빛, 또 다른 퍼포머의 양 눈앞을 가리는 하얀 휴대폰 플래시가 포커스에 들어온다. 이런 시청각적 무력감은 한없이 계속될 것만 같을 때, 갑작스러운 기계적 소음이 날카롭게 빗발치고, 은은한 회색빛 조명의 전시장 곳곳에 그렇게 미동 없이 누워있던 네 명의 퍼포머가 깨어난다. 전시장에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관객들이 만든 유기적 공간은 그랜드 피아노, 반투명한 라텍스 천 조각, 헬륨 탱크, 그리고 직사각형 유리 등의 소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네 명의 퍼포머 중, 키티는 홀터넥, 백리스 드레스로 눈에 띄었고, 다른 세 명은 어둡고 너덜너덜한 데님과 가죽 재질의 옷을 두르고 투박한 구두를 신고 있다. 그들이 착용한 얇은 검은 스타킹과 다리 뒤쪽 피부 사이마다 나체의 훼손된 켄 인형이 끼어있다. 누군가 조금만 눈의 초점을 흐린다면, 인형의 형체를 종아리 근육에서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닌 듯 징그럽게 튀어나온 골격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공연 동안 퍼포머 몸을 구속했던 이 인형들은 스타킹에서 뜯겨지게 된다. 퍼포먼스의 시작을 알렸던 두 가지 불빛의 소유자 이연석과 김용빈은 일어서서 하나의 빛을 가진 몸체를 이룬다. 이연석은 자신의 두 눈을 플래시로 가리고, 뒤에 서있는 김용빈은 자신의 두 손가락을 앞사람의 입에 넣는다. 그리고 서로의 미세한 움직임에 의존하면서 빛을 발하며 걷는다. 그들의 걸음 아래 짙은 갈색의 무광택 라텍스가 깔려 있는데, 이 얇고 구겨진 물건은 어쩐지 스틱스 강을 상기시킨다. 스틱스 강은 그리스 신화에서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를 잇는 강이다. 뱃사공 카론이 영혼을 저승의 강을 건너 그들의 최종 운명이 결정되는 곳으로 싣고 가는데, 여기서 죽은 자는 통행을 위해 동전을 지불해야 하기에 일반적으로 동전을 죽은 자의 입속이나 양쪽 눈에 얹었다고 한다. 납작한 라텍스 강 위에서 네 명의 퍼포머는 둘씩 짝을 짓게 된다. 관자놀이-대-관자놀이, 관자놀이-대-정강이, 정강이-대-정강이 등을 지시한 작가의 디렉션을 즉흥적으로 수행하는 짝지은 몸들은 금방 엉켜버린다. 관자놀이와 정강이뼈의 접촉을 유지해야 하는 구속 아래 각 그룹은 몸싸움을 하는 듯 상대의 몸을 축으로 움직인다. 키티의 밧줄처럼 긴 머리카락은 별도의 생명을 가진 듯 바닥을 쓸며 모두와 엉키고, 상대방을 포옹하는 듯 포획한다. 팔다리가 얽히고 뒤틀리도록 조직된 이 안무에서, 퍼포머 간의 육체적 긴장이 와해되는 순간이 있다. 한 쌍을 이뤘던 키티와 Benjamin Harry Uy는 서로에게서 몸을 떼어내는데, 그 공백은 새로운 권력 관계로 메꿔진다. Uy의 발 쪽에서 더 이상 가까워지려고 하지 않는 키티는 순종적인 자세로 그가 건네는 동전을 입으로 받아먹는다. 호세 루이스 보르헤스의 「자히르」 속 이야기를 떠올리면, 작가는 동전에 유사-영적-상징을 부여하고 있다. 동전은 여기서 눈알, 빛, 보상, 영원함(point infinitum)이며, 모두 키티의 먹잇감이 된다.  관객 무리로 형성된 무대에 새로운 퍼포머 김한주가 나타난다. 작가이자 의상 디자이너인 이창현이 제작한 정갈한 검은색 정장, 치마, 그리고 헤드랩을 차려 입은 그는, 갈고리에 매달려 있던 헬륨 탱크를 내리고 그랜드 피아노 앞에 자리를 잡는다. 다섯 번째 퍼포머이자, 웅변가 같은 역할을 지닌 그는 헬륨을 한 모금 크게 들이켜고, 음악가 위지영이 작곡한 선율 모티프를 즉흥적으로 연주한다. 김한주의 갈라진 목소리는 나머지 퍼포머들 사이로 흐르는 정적을 꿰뚫고 울부짖듯이 노래한다. “지옥은 종이 / 힘없는 연인들 / 내 미간 위의 집에서 웃는 얼굴 둘(…).” 가사는 네 명의 퍼포머들을 한 덩어리로 붙여버리는 주문처럼 들려오고, 네 명은 어깨를 맞대고 스틱스 강에 몸을 눕힌다. 퍼포먼스 마지막 즈음, ‘스틱스 강’에서 표정 없는 퍼포머들은 거의 하나의 기계처럼 모여 앉는다. 헬륨 가스로 가득 찬 노래가 이어질 동안, 퍼포머들은 옷과 살갗에 짙은 꿀과 깃털을 덕지덕지 펴 바른다. 중세 때 죄인 몸에 타르와 깃털을 부었던 것이 죄인에게 수치심을 부과하는 형식이었다면, 여기서 퍼포머들은 충실하게, 스스로 몸에 그것들을 도포하는데, 이것은 어떤 의례 절차처럼 나타난다. 산 사람에서 죽은 사람으로, 동물에서 사람, 돔에서 섭으로, 죄인에서 죄 없는 자로, 공연 말미에 서 있는 퍼포머는 키티뿐이다. 그녀는 입을 벌려 퍼포먼스 동안 머금고 있던 동전들을 하나씩 뱉어낸다. … 이틀 밤의 퍼포먼스 이후 남겨진 출연자들의 의상, 소품과 같은 흔적들은 기존 전시와 자연스럽게 통합된다. 키티의 땋은 머리가 헬륨 탱크와 함께 천장에 매달려 있고, 커다란 라텍스 조각들은 기둥에 그대로 묶여 있거나 애도의 면사포(mourning veil)처럼 일부 사진을 감싸 이미지의 색조를 바꾸고 있다. 엑플렉시스(ekplexis; 밝은 빛에 의한 충격) 이후, 숭고의 섬광이 지나가고 전경은 배경으로 밀려난다. 퍼포먼스 <미간 위 집>에 대한 전주곡에서 사후 송가로 전환하는 동명의 전시 ≪미간 위 집≫은 전시의 퍼포먼스이다.   * 글⋅영한번역 류다연, 교정⋅교열 김무영 * 류다연은 시카고예술대학교 비주얼 및 크리티컬 스터디 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전시 기획사 PACK의 큐레이터이다. 주요 활동으로는 2019년 UC 버클리 대학원의 영화 및 미디어 컨퍼런스 에서 패널리스트로 참여했고, 서울독립영화제2020에서 상영한 김경묵 감독의 실험 단편 <둥지>(2020) 영문 자막 번역을 했다. 다연은 AQNB, FAR-NEAR, Nang, Visla, The Kitchen’s blog 등 다양한 온·오프라인 잡지에 에세이, 전시 리뷰, 작가 인터뷰를 기고했으며, 서울을 기반으로 전시 기획과 번역 활동을 이어 갈 예정이다.